우리는 기대하는 수준까지 올라가는 게 아니라 훈련한 수준까지 떨어진다. - 아르킬로코스
최근 <타이탄의 도구들>을 읽으며 아르킬로코스의 말을 처음 접했다. '우리는 기대하는 수준까지 올라가는 게 아니라 훈련한 수준까지 떨어진다.' 나는 이 짧은 문장을 한 번 읽음과 동시에 거의 동일하게 외웠고, 그 즉시 읽던 책을 덮어버리고 옆에 펼쳐둔 노트에 문장을 반복해서 적기 시작했다. 글씨가 조금 정리되는 듯하자 이번에는 가장 아끼는 포스트잇을 뜯어 문장을 옮겨 적었다. 그리고는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 두었다. 지난주에 있었던 일이다.
아르킬로코스의 말은 내가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것들을 구태여 고민하게 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두가 꿈을 이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릴 것을 성원할 때, 아르킬로코스는 걸음을 멈추고 등 뒤를 돌아볼 것을 충고한 것이다. 사실 '한 번쯤은 돌아보는 게 어떠할까' 수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떨어질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수백 권의 자기계발서가 두려움을 잊고 날아오르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느라 바쁜데, 아르킬로코스는 그것을 비웃듯 우리에게 예정된 추락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었다.
아르킬로코스의 말을 읽고 첫 번째로 느낀 감정이 놀라움이었다면 두 번째로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이제 막 꿈을 찾고 노력하기 시작한 나는 목표를 견지한다면 반드시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멋대로 확신했다. 하지만 아르킬로코스의 말처럼 만약 지금 당장 내가 추락하게 된다면 어떨까? 꿈과 목표만 있지 정작 이루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는 나는 실패한 사람이 될 것이 뻔했다. 나는 대체 무엇을 믿고 성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그간 나름대로 해온 노력의 크기는 내가 원하는 삶의 가치에 비해 한없이 작았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세 번째로 느낀 감정은 열의였다. 어떻게든 수준 높은 사람이 되고야 말겠다는, 그래서 혹여나 추락하더라도 다시 나의 꿈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그런 열의. 그동안 내 열정의 방향이 아름답고 위대한 '꿈' 그 자체에 있었다면, 아르킬로코스의 말을 통해 불타오르기 시작한 마음의 불길은 나의 발 밑에서부터 나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언젠가 세상이 나를 밑바닥으로 내리꽂을 예정이라면, 그래서 아르킬로코스의 말처럼 내가 필연적인 추락을 맞이한다면 나는 그때를 대비해서 나의 바닥을 하늘과 가까운 곳까지 올려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무것도 없는 나의 바닥은 해저 몇만 리의 깊은 어둠 속에 있겠지만, 매일 바닥을 끌어올리는 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지면과 맞닿은 위치까지 그것을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그뿐만인가? 산의 정상, 구름의 틈, 우주의 경계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일 바닥을 끌어올린다면 분명 나의 꿈이 위치한 드높은 자리가 곧 나의 바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고, 바로 이것이 내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의미의 목표였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정한 목표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절망하곤 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지난 학기 성적을 보고 그간의 노력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고, 몇 달째 작아지지 않는 체중계 속 숫자에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나의 수준에 맞지 않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얻은 모든 결과는 내가 '훈련해 온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공부량이 충분하지 않았으니 좋지 않은 성적을 받은 것이고, 운동량이 충분하지 않았으니 살이 빠지지 않은 것이다. 그뿐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최고의 목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음번에 지금보다 더 낮은 바닥에 내리 꽂히지 않도록 나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생각이 한결 가벼워졌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미래를 상상하며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조금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래서 매일매일 아주 조금의 변화라도 거듭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추락하더라도 높은 곳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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